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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센티넬 가이드 협회 소속의 신입 사원 사토 에이이치는 발걸음을 내달리고 있다. 한 사람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텐칸(天漢)연구소 소속의 한 연구원이었다. 그를 찾지 못하면 입사한 지 일주일 만에 시말서 신세를 지게 될 것이었다. 드넓은 건물을 열심히 달리며 과거를 회상한다.
1988년 지구는 격변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지각변동이 세계 곳곳에서 대규모로 일어나고 자연재해를 일으켰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형태의 괴물들이 발생해 도시를 파괴했다. 근원지는 불명이었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갑작스레 일어난 재앙에 인류는 멸망을 짐작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것을 자연의 진화로 규정하고 극복하기를 포기한 것이다. 하지만 이상 현상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불특정 다수의 각성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선의로 사람을 돕는 이부터 강대한 힘으로 괴물을 없애는 이까지, 그야말로 인류의 한 줄기 빛이었다. 희망이 생기자 사람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해와 각성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알기를 포기하지 않고, 재앙을 이겨낼 수 있는 방향을 향해 걸었다. 무너진 도시의 수복부터 시작해 각성 능력과 관련한 산업이 발전했다. 세계의 흐름은 1988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08년 3월, 현재까지도 사람들은 싸우고 있다.
日本センチネルガイド協会, 일본 센티넬 가이드 협회는 일본의 모든 센티넬과 가이드를 관리하는 정부 산하의 기관이다. 정식 약어는 JSGA(JAPAN Sentinel Guide Agency)이지만 일본인들은 모두 니센이라고 짧게 줄여 부른다. 1989년 정식으로 출범하여 체계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조직에서 현재는 일본 전역에 지부를 보유하고 있는 초대형 기관이 되었다. 17세 이상의 인구는 모두 일 년에 한 번씩 의무적으로 각성 검사를 받는다. 징후가 있거나 본인이 희망하면 그 이전에도 검사를 받을 수 있지만 대부분 굳이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부모가 원치 않는다고 보는 게 맞다. 어린 나이에 각성이라도 했다가는 강제로 평범한 삶과 작별이기 때문이다. 모두 1988 사태를 겪고 살아남은 사람들이니 당연한 마음이다. 에이이치가 일하고 있는 이곳은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가진 본사이자 도쿄 지부다. 사건을 이토록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은 3개월의 수습 기간을 갓 마치고 입사한 신입이기 때문이었다. 이 회사에 들어오기 위해 달달 외운 것들이라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향하고 있는 텐칸 연구소란 어딘가 하면, 과거에는 텐칸 제약이라는 이름의 큰 제약회사였다. 니센이 출범한 뒤 앞으로를 대비해 센티넬과 가이드를 분석하고 여러 가지를 개발하기 위한 인력이 필요했다. 정부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새 조직을 더 설립하고 키우기에는 늦는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사태 이후에도 가장 건실하게 남아있던 텐칸 제약이 선택된 것이다. 초반에는 제휴의 형태로 이루어지더니 점점 영향력이 커져 거의 한 건물을 쓰는 지경까지 왔다. 니센과 본 건물은 분리되어 있지만 몇 개의 통로로 연결되어 있어 한 건물로 봐도 무방한 구조다. 사명도 텐칸 제약에서 텐칸 연구소로 바뀌었고, 이제는 반쯤 공공기관 취급을 받고 있다.
도쿄 지부로 첫 발령을 받은 에이이치는 제가 나름 엘리트라 자부했다. 입사하자마자 S급 센티넬의 검사 업무를 보조하게 되었을 때도 자신이 있었다. 모든 센티넬은 복귀 후 몸 상태에 대한 검사를 받아야 한다. 몸에 부작용이 있지 않은지, 폭주 가능성이 있는지 등을 겸해서 가이딩도 받고 돌아가는 일종의 업무 절차다. 일상 업무라도 비상사태를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런 중요한 업무에 자신이 투입된 것이다. 꿈에 가득 찬 채 만난 사수는 조금 의욕이 없고 요령을 피우는 유형의 사람으로 보였다. 그가 말하길, 모두에게 필수라지만 크게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거나 중요하지 않은 출동이었을 경우 생략하고 가라로 작성해서 보고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물론 S급 센티넬은 일거수일투족이 주목받기 때문에 매번 철저히 검사한다고 한다.
에이이치가 담당한 센티넬의 이름은 노바(NOVA)로 폭발력이 마치 신성과도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본명은 키타 에이쇼, 18세다. 센티넬의 연령층은 매우 다양하다. 그가 3년 차라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어린 나이였다. 어리다고는 해도 실력 발군에 화려한 능력으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이 나라에 없을 것이다. 태양도 집어삼킬 것처럼 뜨거운 화염으로 적을 눈부시게 태워버리는 모습, 훤칠한 외형과 어린 나이까지 스타성이 다분해 보였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광고 같은 것도 찍고 마음껏 즐겼을 텐데 그는 대외 활동은 일절 하지 않는 걸로 알려져 의아했다. 일주일 지켜본 바로는 날카로운 인상에 비해 잠잠했다. 새 얼굴이라 그런지 에이이치에게도 경계하는 모습을 보일 뿐 그럭저럭 고분고분했다. 그러다 일주일째 되는 오늘 일이 터졌다. 인근 괴수 소탕에 참여한 그가 복귀하자마자 아무 말 없이 사라진 것이다. 수신기 전원도 꺼져 있고 센티넬들이 출동 시 몸에 착용하는 실시간 폭주 수치 측정기의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도망이라도 간 건가 패닉 상태에 빠진 에이이치는 거의 울며 사수에게 매달렸다. 사정을 들은 사수는 별일 아니라는 양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지령을 내렸다.
“텐칸에 가서 미나이 아즈사라는 사람을 찾아요. 연구 1팀 선임 연구원이에요. 사진이.. 아, 지금 갖고 있는 게 없네. 키 크고 머리 길고 안경 쓴 남자거든. 보면 알 거예요. 그 사람 찾아서 얘기하고 나중에 보고서 대충 써요. 도와줄게요.”
대충이라니, S급은 철저히 검사한다느니 한 말도 예의상 한 것 같았다. 설명도 조금 부족했다. 저걸로 사람을 어떻게 찾으라는 건지. 그래도 일단 시키면 하는 게 신입의 미덕이니 곧바로 뛰쳐나왔다. 연구 1팀에 가서 물어보면 될 것이다. 그를 찾아 드넓은 건물을 달려 연결통로에서 신원을 인증한 뒤 텐칸으로 넘어갔다. 연구 1팀에 방문하려면 또 여러 귀찮은 절차를 거쳐야 할 것이었다. 복도에 지나다니는 연구원만 해도 몇인데 그냥 찾으라면 사막에서 바늘 찾기다. 그렇게 생각하며 열심히 걷고 있던 순간 목격한 것은 놀랍게도 운 좋은 광경이었다. 눈앞에 걷고 있는 남자의 특징이 사수가 알려준 것과 완전히 일치했다. 키는 1.9m쯤은 되어 보였고 아래로 묶은 검은 머리가 허벅지까지 길게 내려왔다. 보면 안다는 게 무슨 말인지 단번에 이해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를 불러세웠다.
“미나이 선임 님.”
돌아보는 그의 명찰에 히라가나로 적힌 이름 여섯 자가 똑똑히 보였다. 정답이었다. 곧바로 명함을 내밀며 설명을 이어 붙였다.
“니센의 사토 에이이치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노바가 임무 복귀 후 검사를 안 받고 사라져 버려서요. 보고드렸더니 선임님께 말씀드리면 될 거라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용건을 들은 그는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얼굴을 쥐고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금방 입을 열었다.
“오시느라 고생하게 만들었네요. 말씀하신 건은 제가 해결할게요. 우선 이상 없다고 보고 부탁드립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땐 이쪽으로 편하게 연락 주세요.”
“.. 아, 네. 감사합니다.”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프로페셔널한 대응이었다. 명쾌한 답변에 에이이치는 얼빠지게 대답했다. 그런 에이이치를 보고 그는 망설이다 몇 마디를 덧붙였다.
“.. 새로 오신 거죠? 착한 아이니까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 일은 잘 처리할 테니 걱정 마세요.”
“아닙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간곡히 부탁하는 그의 모습에 손사래를 치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앞서 냉정하게 대응하던 모습과 달리 갑자기 인간미가 물씬 묻어났다. 그러니 더욱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관계가 있어서 저런 부탁을 하는 걸까. 연구원이 무슨 연유로 이런 일까지 하는 걸까. 그와 인사를 나누고 헤어질 참이었으나 호기심을 견디지 못한 한 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그런데, 어떻게 찾으실 건가요?”
발을 떼려던 그가 돌연 멈칫했다. 그러고는 매우 당연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처럼 입을 연다.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이 눈에 박혔다.
“어디 있는지 알아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살짝 웃으며 목례한 뒤 길을 떠났다. 에이이치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의문을 품고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다들 익숙하게 움직이는데 자신은 아직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이 풍경의 일부가 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이었다. 하지만, 무사히 해결했으니 됐으려나? 우선 제 자리로 돌아가서 보고하기로 결정했다. 한층 여유 있는 발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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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낮부터 아즈사는 건물 밖으로 나섰다. 팀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연차를 결재한 뒤 일찌감치 퇴근했다. 모두 아무렇지 않게 배웅해 주었다. 집으로 가기 전 주문해 둔 케이크를 픽업하기 위해 가게에 들렀다. 단것을 즐기지 않아도 좋아할 만한 걸로 골랐다. 귤이 많이 들어간 과일 생크림 케이크다. 아마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케이크를 받은 뒤 가게를 나와 서둘러 걸었다. 사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택이 있다. 10분 남짓을 걷자 거주 중인 사택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지 않고 4층까지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아즈사의 집은 401호다. 문 앞에 서서 목걸이로 된 명찰을 들어 올렸다. 문을 여는 방법은 두 가지다. 도어락에 비밀번호를 누르거나, 칩이 내장된 사원 카드를 갖다 대는 방법이다. 사택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라서 가능했다. 문이 열리고, 신발을 벗고 있으면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진다. 몇 발자국 내디디니 벽에 가려져 있던 거실 풍경과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형! 왔어? 늦었잖아.”
에이쇼가 소파에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목 빠지게 기다린 듯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테이블에 수신기를 포함한 여러 장비들과 붉은 레더 자켓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예상한 그대로의 모습에 하하 웃으며 짐을 내려놓았다. 평소 이렇게 말없이 이탈해 자신을 찾아오면 몇 마디 정도는 충고하는 아즈사였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 말 없이 옷걸이에 가운을 벗어 정리했다. 에이쇼도 그 사실을 느끼고 있는지 소파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별말 없네.”
놀라기보다는 알면서 모르는 체하는 투였다. 아즈사가 옆에 앉으려 하자 옆으로 살짝 비켜 자리를 내어주었다. 자리에 앉아 케이크 박스에 손을 뻗는다. 에이쇼는 소파 등받이에 팔 하나를 걸친 채 이쪽을 보고 있다. 어찌나 시선이 따가운지 옆통수가 뚫릴 것 같다. 속이 훤히 보여 귀여웠다. 상자를 열어 케이크를 꺼내며 에이쇼가 기대하고 있을 말을 건넨다.
“그럼, 당연하지. 에이쇼.. 생일 축하해. 자.”
손에 든 것을 에이쇼에게 내밀어 보였다. 에이쇼는 입꼬리를 크게 당겨 웃더니 헤, 하는 웃음소리를 연이어 몇 번이나 냈다. 예상은 했어도 굉장히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오늘은 에이쇼의 18살 생일날이다. 그가 일이 끝나자마자 전부 내팽개치고 달려와 이 집에 들어와 있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도어락 비밀번호는 몇 년 전에 아즈사가 직접 알려주었다.
에이쇼가 종종 절차를 무시하고 아즈사에게 오기 시작한 지도 꽤 되었다. 예전부터 그는 아즈사에게 가이딩받기를 원했다. 아즈사의 직업은 연구원이나, 과거 B급 가이드로도 판정받은 바 있었다. 겨우 아슬아슬하게 B급 선에 걸친 수준이기에 전문 가이드를 직업 삼지는 않았다. 하지만 등급이 어떻든 센티넬보다도 희소한 가이드라는 점, 텐칸 연구소 도쿄 지사 근무자라는 점 등을 고려하여 센티넬들의 가이딩 업무도 심심찮게 맡고 있다. 여러 센티넬을 가이딩해주지만 에이쇼같은 S급 센티넬을 만나는 일은 전혀 없다. 등급의 차이가 있으면 효과가 경미해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원하는 것이었다. 에이쇼를 위해 시간을 할애하는 건 아즈사에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므로, 고등급의 가이딩과 병행하되 자신이 자주 만나 가이딩을 해 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에이쇼도 그 정도로 수긍하며 지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요구사항이 바뀌었다는 게 여럿에게 문제를 만들었다. 요구사항이라 함은, 아즈사를 제 전속 가이드로 지정해달라는 내용이다. 상성이 아주 잘 맞아 효율이 좋은 센티넬과 가이드의 경우 전속 계약을 맺어 파트너로 활동하기도 한다. 그 경우 가이드가 평소 센티넬과 함께 지내면서 상태를 관리하고 출동 시에도 같이 나가 보조한다. 존재만으로 도움을 주는 상성이라는 게 실존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효과는 당연히 없고, 에이쇼와 등급부터 하늘과 땅 차이인 아즈사에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에이쇼는 상관없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혹은 상관없을 만큼 원하거나.
니센에서도, 아즈사 본인도 그 요구를 받아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에이쇼는 주변과 미묘한 대치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듯했다. 가이딩을 받지 않는다고 버티거나, 이렇게 아즈사의 집에 와 많은 사람을 번거롭게 만들고는 했다. 그때마다 주의를 주었지만 아즈사가 따끔하게 혼낼 생각이 없다는 것쯤 에이쇼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자신 외에 에이쇼를 지적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이 상황은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특별한 날인만큼 오늘은 반드시 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에이쇼가 오지 않았으면 섭섭했을지도 모른다. 일 생각일랑 접어두고 케이크 가게에 전화를 걸었을 때부터 그랬다.
“에잇.”
에이쇼가 손가락으로 케이크를 크게 푹 찍어 아즈사의 뺨에 묻혔다. 멍하니 있던 아즈사는 휘둥그레 뜬 눈을 꿈뻑거렸다. 에이쇼가 한층 짓궂은 웃음소리를 냈다. 아즈사는 손가락을 들어 뺨에 묻은 크림을 조금 묻혀 입으로 가져다 댔다. 달달하지만 담백하게 맛있는 맛이 났다. 무의식적으로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거 맛있다.”
“그래? 나도 먹어 볼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먹어보라는 의사를 표현했다. 에이쇼가 팔을 들어 올렸다. 직후 케이크를 다시 손으로 찍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손은 아즈사의 얼굴로 향했다. 큰 손이 턱을 가볍게 붙잡고, 상반신을 기울여 뺨에 남아있는 크림을 핥았다. 크림을 뚫고 얼굴에 닿는 혀의 촉감을 확실히 느꼈다.
“그러게. 맛있네 이거.”
에이쇼가 입맛을 다시며 제 입술에 남은 크림을 엄지로 훑었다. 아즈사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던 터라 당황했지만 티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크림이 살짝 묻어 버린 안경을 조용히 벗은 뒤 닦기 시작했다. 어느새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아이로 큰 건지 복잡한 심경이다. 작년 생일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모르는 척할 수도 없고 아는 티를 낼 수도 없는 입장은 어렵다. 저 즐거워 보이는 얼굴에 대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사사건건 짚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 화제를 돌리자. 안경을 얹자 시야가 또렷해졌다.
“저녁에 다시 꺼내서 초 불자.”
“좋아.”
돌아오는 것은 아무렴 좋다는 듯 웃는 얼굴이다. 시선을 회피한 채 케이크를 도로 집어넣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손바닥을 위로한 채 팔을 뻗으며 말한다.
“에이쇼, 오늘 폭주 수치는 어땠어? 상태가 괜찮아도 가이딩은 받아야지.”
대놓고 화제를 바꿨지만 에이쇼는 수긍하는 듯 보였다. 정확히는, 이 정도는 넘어가 주지라는 느낌에 가까웠다. 아즈사의 반응이 썩 마음에 든 모양이다. 뻗은 손 위로 따뜻한 손이 턱 얹어졌다. 잡은 손을 통해 가이딩이 이어진다.
“오 퍼센트.”
“양호하네. 크게 받을 필요는 없겠는걸..”
“그럼 십오 퍼센트야!”
에이쇼가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농담이야. 솔직하게 말해도 돼.”
“끙..”
조금 웃었지만 불안해하지 않도록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미소를 띠며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에이쇼는 앓는 소리를 내다가도 손이 다가오자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대로 머리를 쓰다듬자 얌전히 눈을 감았다. 가만히 있으려 하지만 머리가 자꾸 손바닥을 향하는 경향이 조금 있다. 일련의 행동이 영락없이 순한 강아지를 닮았다. 귀여워서 웃음이 난다.
“있잖아. 최근에 말이야.. 직원이 새로 온 것 같더라. 오늘 에이쇼가 없어져서 당황했어.”
“맞아. 온 지 일주일 정도 됐나? 나 이 정도면 많이 기다려 줬어.”
회사 얘기가 달갑지 않을 텐데도 에이쇼는 싫은 기색 없이 답해 주었다. 가이딩을 유지하며 조곤조곤 대화를 이어나갔다.
“한 번 잘 지내 보면 어때? 다음에 만나면 사과도 하고.”
“지금도 충분히 잘 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에이쇼가 싫지 않을 정도로만 말이야. 응?”
“.. 형이 그렇다면. 알았어. 노력해 볼게.”
“고마워. 장하다, 에이쇼.”
결국 에이쇼는 못 이기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에이쇼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주변 사람들과 더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많이 힘들 텐데 노력하겠다고 말해 주니 기특하다. 이럴 때면 자식을 키우는 것처럼 걱정스럽고도 대견한 마음이 든다. 에이쇼를 뭐라도 해주고 싶다. 그러고 보니 너무 바쁜 탓에 고민만 하다가 에이쇼의 생일 선물을 미리 준비하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을 담아 이야기했다.
“혹시 생일 선물로 갖고 싶은 거 있어? 미리 준비를 못 했네.”
“있어.”
단칼에 답이 돌아왔다. 에이쇼가 머리 위의 손을 붙잡아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정말? 뭔데?”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그게 무엇이든 들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형, 내 가이드 해 줘.”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또 아즈사를 입 다물게 만들었다. 잠시 잊고 있던 현실이 떠올랐다. 이 부탁은 절대로 들어줄 수 없다. 에이쇼 본인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쉽게 말해 센티넬의 부작용은 능력을 사용할수록 몸에 독소가 쌓이는 것인데, 이를 정화할 수 있는 게 가이딩이다. 좋은 가이드와 만나면 독소의 완전한 제거는 물론이고 훨씬 건강하고 팔팔한 상태로 만들어 준다. 맞지 않는 가이드는 독소를 열심히 긁어내는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에이쇼의 몸을 생각해서라도 물러설 수 없다.
“.. 지금 하고 있잖아.”
“이거 말고. 알면서.”
또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래도 에이쇼는 끈질기게 이쪽을 쳐다보았다. 좋게 거절할 말 따위는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늘 하는 형식적인 얘기를 또 하게 된다.
“에이쇼, 너한테는 S급 가이드가 필요해.”
“나 안 다쳐.”
“다치지 않아도.. 능력을 아무리 잘 조절해도 폭주가 올 수 있는 게 센티넬이야. 그렇게 되지 않도록 막는 게 가이드의 일인 걸.”
“그러니까 형이 해 주면 되지.”
“.. 나는 네가 힘들 때 도와줄 수 없어.”
씁쓸함을 가득 품고 그렇게 말했다. 내가 힘들 때 도와준 건 형밖에 없는데. 에이쇼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마저도 대꾸할 수 없어 잠자코 있었다. 에이쇼는 타고나길 강하고 센스가 좋아 대부분의 싸움에서 크게 고전하지 않는 재능형 센티넬이다. 하지만 아무리 강하대도 가이드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게 센티넬이라는 종족이다. 센티넬의 폭주 사고는 본인을 포함한 큰 규모의 사망 사건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 일에 에이쇼가 휘말린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물론 에이쇼가 자신을 원하는 이유는 잘 알고 있고 그걸 단순한 고집으로 치부하지도 않는다. 다만 말 한마디로 해결되지 않을 복잡한 사정이다. 그래서 아즈사는 늘 비겁하게 침묵하기를 선택한다. 에이쇼의 바람은 들어주고 싶어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외면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뭐~, 사실 그럴 거라고 생각했고.”
덤덤한 음성이 정신을 일깨운다. 에이쇼는 잡은 손을 놓고 두 팔을 벌렸다.
“알았으니까. 안아줘. 그 대신이야.”
에이쇼가 송곳니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진지했던 분위기가 단칼에 풀려 든다. 저 미소 하나면 언제든 순식간에 마음이 놓이곤 했다. 아즈사는 에이쇼를 따라서 웃음을 지었다.
“오늘이 아니라도 언제든지 안아줄게.”
허리 부근에 팔을 두르며 마주 안았다. 따뜻한 품에 안기자 순식간에 온몸이 따끈따끈 해졌다. 에이쇼의 몸은 1년 내내 따뜻하다. 체온이 항상 일정해서 본인은 더위도 추위도 타지 않고, 한 겨울에 반팔 티셔츠만 입고 활보해도 문제가 없다. 주변인의 입장에서는 가까이 있으면 여름에는 조금 덥고, 겨울에는 따뜻해서 좋다. 각성한 뒤 생긴 체질인 셈이다. 에이쇼가 껴안은 채로 뒤로 엎어지듯 누웠기에 같이 소파에 엎어질 수밖에 없었다. 끌어안고 엎드려 있으려니 조금 불편했다. 자꾸 꿈틀거렸더니 가만히 있으라고 핀잔이 날아온다. 잠시 안경을 벗어 테이블에 올려 둔 뒤 에이쇼에게 얼굴을 편히 기댔다. 숨이 작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게 변화한다. 경험으로 말하자면 이럴 때는 에이쇼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는 게 좋다. 이 또한 에이쇼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등 뒤에서 내려뜨린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잠시 눈을 감았다. 에이쇼와 붙어 있으면 항상 너무 따뜻해서 잠들어버릴 것만 같다. 느슨하게 안고 있는 무게감도 안정적이라 작았던 아이가 이만큼이나 컸구나 생각하게 된다. 에이쇼는 이 포옹에서 포옹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는 걸까? 가이드란 결국 특수한 성분이 담겨 있는 일반인 같은 것이라 센티넬의 감각을 느낄 수 없다. 그냥 좋았으면 좋겠구나, 하는 마음을 가지고 안아줄 뿐이다. 이 편안한 침묵은 꽤나 좋아한다. 에이쇼와 함께 있는 시간도 좋아한다. 사실은 별 탈 없이 이런 하루가 지속된다면 무척 행복할 것 같다. 에이쇼에게 힘든 일이 생기지 않고, 매일매일 작은 일탈을 하고, 충고하는 척만 하고 지나가는 일상 말이다. 꿈같은 상상을 하며 정말로 꿈속에 접어들려던 때였다.
꼬르륵.
“…”
“앗.”
맞닿은 몸에서 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즈사가 품에서 부스럭대며 일어나자 에이쇼가 아쉬운 소리를 냈다. 대낮부터 잠들어버릴 뻔했다. 소파에서 내려오며 테이블의 안경을 집어 들었다. 에이쇼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맛있는 거 만들어줄까?”
“좋지! 나도 같이 할래.”
따라서 몸을 일으킨 에이쇼가 뒷머리를 쓸며 웃었다. 아직 하루는 한참이나 남았다. 둘이 함께 이 자리에 있으니, 명실상부 최고의 하루가 지나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