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으면 그날의 꿈을 꾼다.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 끝에 무엇이 기다릴지 분명 알고 있다. 가서는 안 된다는 예감을 하면서도 발걸음을 멈출 수 없다. 그곳만이 나의 돌아갈 집이기 때문이다. 느린 손동작으로 문을 잡아 열면 세계의 뒷면이 보인다. 해가 중천인데도 까마득하게 어둡다. 무언가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로 가득하다. 당연한 수순처럼 휩쓸리다 보면 어렴풋이 알게 된다. 이제는 떠날 때가 되었다. 더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아니, 어쩌면 먼 옛날부터 마음은 집을 떠나 있었을지도 모른다.
꿈에 쫓기듯 눈을 뜨면 어두컴컴한 한밤중이다. 시선을 흘겨 시계를 좇자 서너 시도 채 되지 않은 것이 보인다. 그리고 옆을 가득 채우는 온기를 느꼈다. 항상 이 꿈에서 깨어난 아즈사를 현실로 이끌어주는 존재다. 세상모르게 자고 있다. 손을 뻗어 복슬한 머리카락을 만졌다. 이렇게 쓰다듬어도 에이쇼는 전혀 깨지 않아서 좋았다. 어차피 자고 일어나면 사자의 갈기 같은 머리카락이 되기에 조금 만져도 전혀 티 나지 않는다. 멍하니 에이쇼의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꿈이든 뭐든 무념무상한 상태에 가까워지고 만다. 에이쇼와 살기 전에는 누워서 한참이나 같은 생각을 하느라 금방 잠에 들지 못한 적도 많았다. 아즈사는 곧 손을 거뒀다. 이불을 에이쇼의 어깨까지 당겨 제대로 덮어준 뒤 자신도 눈을 감았다. 모쪼록 금방 다시 잠들어야 할 것이다. 오늘은 에이쇼의 집에 가기로 한 날이니까.
家路 - 귀로
“なんでそんな緊張しとんねん?”
왜 그렇게 긴장한 거야? 에이쇼가 억양이 가득 드러나는 말투로 물으며 아즈사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아즈사는 선물 세트가 굳게 들린 손을 고쳐 쥐었다. [木田]. 두 글자가 적힌 명패를 빤히 바라보던 시선을 에이쇼에게로 돌렸다. 두 사람은 현재 에이쇼의 본가, 즉 두 사람이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동네에 와 있었다. 아즈사가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많이 떨려 보여?”
그 물음에 에이쇼는 아즈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눈곱만큼도 티가 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 눈에는 보였을 뿐이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완~전. ..이라고 하고 싶지만, 안심해. 엄마랑 아빠는 모를걸.”
그러려나. 아즈사가 작게 중얼거리며 미소 지었다. 그 모습에 에이쇼는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에게는 그저 편하고 친한 부모이다 보니, 그가 제 부모님을 얼마나 특별하게 생각하길래 저렇게 반응하는지 궁금했다. 생각해 보면 집에 오라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그랬다. 처음에는 거절이었다. 이제는 학생도 아니고, 주말에 가족 간의 시간을 방해하는 것은 민폐다. 등의 지극히 상식적인 이유를 대던 아즈사였다. 굴하지 않고 설득해 보았지만 밀리지 않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를 최종적으로 함락시킨 말은 이거였다. 엄마랑 아빠도 형 보고 싶대. 그 말을 들은 아즈사는 3초 정도 고민하더니 곧장 알겠다고 답했다. 설득에 성공한 건 좋지만, 줄곧 처음 보는 느낌의 표정을 하고 있어서. 그야말로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보다.. 그런 거 안 사 와도 되는데.”
“그래도 그냥 오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괜찮다니까. 다들 참 말 안 듣는단 말이지~”
“응?”
“아무것도 아니야. 됐으니까 이제 들어가자!”
“에이쇼, 초인종..”
“ええで-”
내 집에 내가 들어가는 데 초인종 같은 건 사절이었다. 에이쇼가 아즈사의 손목을 붙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
펑.
두 사람이 문을 열자 발을 내딛자마자 종이 꽃가루가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おかえり~!”
환하게 웃고 있는 부부가 터진 폭죽을 손에 든 채 입을 모아 말했다. 제대로 안에 발을 들이기도 전이었다. 아즈사는 순간 인사하는 것도 잊고 가만히 놀라고 말았다. 에이쇼가 그런 아즈사를 보며 제 머리 위에 떨어진 꽃가루를 떼어냈다.
“이거 하지 말자고 했잖아!”
에이쇼는 적잖이 부끄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확실히 이런 서프라이즈는 낯간지럽고도 남을 만한 입장이었다. 그제야 에이쇼가 아까 했던 말이 이해되었다. 부끄러우니까 이런 건 하지 말자고 몇 번이나 말하는 에이쇼와, 추호도 듣지 않고 폭죽을 준비하는 일가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했다. 그 광경을 상상하면 아즈사는 허물 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감사해요.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이건, 약소하지만..”
“어머, 미안하게.. 잘 받을게. 아즈사 군.”
“난 말렸거든.”
부모님의 눈총이 느껴지자 에이쇼가 빠르게 덧붙인다. 이에 장난이라며 웃는 얼굴은 에이쇼와 똑 닮아 있다. 아즈사는 옛날부터 이 가족의 모습을 좋아했다. 에이쇼를 빼다 박은 듯한 아버지, 외모는 닮지 않았지만 웃는 얼굴만은 똑같은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옷자락을 붙잡고 절반 정도 숨어 호기심을 열렬히 빛내고 있는 에이쇼의 여동생 히마리였다. 아즈사는 조심스럽게 쭈그려 앉으며 몸을 낮췄다.
“おはよう、ひまりちゃん。”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히마리는 아즈사가 현재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보다도 어렸다. 그래도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면 정말 기쁠 것이다. 조금은 떨리는 마음으로 히마리를 올려다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즈사를 잠시 바라보던 히마리는, 숨은 게 언제냐는 듯 앞으로 걸어 나와 당당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큰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쳐다보는 얼굴은 더욱 어린 시절의 에이쇼와 닮게 성장해 있었다. 당찬 모습이 귀여웠다. 그러고도 히마리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쭈뼛거리다 아즈사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이거, 나도 같이 뿌렸다구~”
히마리가 수줍게 내밀어 보여준 것은 아즈사의 머리에서 떼어낸 꽃가루였다. 히마리의 손에도 사용한 폭죽이 들려 있었다. 아즈사는 이 행동이 너무 기특해 활짝 웃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너무 크게 웃으면 비웃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그래서 대신에 손을 올려 히마리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머리칼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은 기본이다.
“착한 아이네. 고마워. 히마리 짱이 환영해 줘서 너무 기뻐.”
칭찬과 함께 머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히마리의 입꼬리가 살살 올라갔다. 칭찬을 받으면 아닌 듯하면서 은근히 솔직하게 좋아하는 것이 꼭 누군가가 생각났다. 마침 때맞게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아즈사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히마~ 오빠도 좀 환영해 주지 그래?”
“에 짱은 됐어.”
“이 녀석이..”
히마리가 아즈사를 붙잡은 채 에이쇼에게 메롱 하며 혀를 내밀었다. 에이쇼가 얄미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제 앞이라 별달리 뭐라 하지 못하는 것이 보였다. 평소의 남매 관계가 어떨지 눈에 훤했다. 에이쇼의 오빠로서의 면모를 보는 것은 아즈사에게도 재미있는 일이다. 에이쇼에게 눈을 맞추며 이야기했다.
“에이쇼, 좋은 오빠구나? 대단해.”
예상치 못한 칭찬이 들려오자 에이쇼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헛기침을 했다. 뭐, 그렇지. 큼. 쑥스러워 하면서도 부정하지 않는 모습이 정말 동생과 빼닮아 있었다. 둘이 정말 닮았네. 그렇게 중얼거리기가 무섭게 두 사람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하?!”
아즈사에게 모여들었던 두 시선이 목소리가 겹침과 동시에 서로를 노려보았다. 어쩌면 이렇게 똑같은지,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즈사뿐만 아니라 남매의 부모님까지 웃음을 터뜨렸다.
-
“그럼 나가볼 테니까 편히 있다 가렴~”
아즈사와 에이쇼를 제외한 세 사람이 집에서 나갔다. 문이 닫히자 시끌벅적했던 공간이 적막에 잠겼다.
애초부터 가족들이 집을 비워주기로 했던 하루였다. 간단히 인사만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할 말이 많았던지 예상보다 대화가 길어졌다. 그동안의 근황도 나누고, 종국에는 당장 어제도 만났던 사람들처럼 최근의 이야기를 했다. 아즈사 또한 처음의 긴장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편안히 대화했다. 에이쇼가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한 얘기를 할 때는 꼭 엄마가 두 명이 된 기분이었다. 그 모습을 회상하던 에이쇼는 가만히 입을 열었다.
“부담스러울까 했는데 괜찮았나 봐.”
“응. 에이쇼를 재우고 있으니까 전부터 연락은 여러 번 했지만.. 이렇게 뵌 건 오사카로 오고 나서 처음이잖아. 나도 모르게 들떴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형이랑 우리 엄마는 참 잘 맞아.”
히마리 녀석도 몇 년 만에 만난 거면서 금세 좋다고 붙어있고 말이야. 다들…. 에이쇼는 멍하니 중얼거리며 아즈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까부터 설레고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17세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것은 간지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고, 이전의 미묘한 기분을 다시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미묘한 기분이라 하면 그런 것이다. 형이 이 집에 오길 바란 것도 자신이고 다 같이 훈훈하게 대화하기를 기대한 것도 자신이지만, 정작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잘 지내는 모습을 보니 복잡해진다. 도대체 이게 무슨 기분일까. 아아.. 모르겠다. 복잡하게 생각하는 게 싫어진 에이쇼는 앉아있던 소파 위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질투? ..어느 쪽에? 그런 건 아닌데. 좀 더 긍정적인 느낌이다. 그보단.
“형, 키타 아즈사면 좋을 텐데.”
생각이 많아져 역으로 생각이 없어진 에이쇼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래. 맞아. 형이랑 한 집에서 태어났으면 내가 더 잘 해 줬을 거거든. 입 밖으로 뱉고 나니 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이는 본인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정도의 생각인지도 몰랐다. 혼자 개운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니 아즈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을 것 같아.”
그 말에 아즈사를 향해 스르륵 고개를 돌렸다. 당연한 답을 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멍하니 있던 에이쇼는 그 표정을 보자 알았다. 머릿속의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아즈사를 집으로 데려오기 전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했다. 직접 들은 적은 없지만 별로 근처에 오고 싶지 않은 건 아닐까 하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집에도 데려오고 싶었다. 변한 것도 많고, 가족들에게 아즈사를 보여주고 싶기도 했으니까. 결국엔 배려심과 욕심을 모두 발휘하는 선에서 끈덕지게 설득해 데려온 것이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아즈사는 이 곳을 정말 좋아했다. 반사적으로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俺さ 。 ”
“응.”
“괜히 형한테 억지 부린 거 아닐까 걱정했어.”
그렇게 말하는 에이쇼는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별로 억지는 아니었네.”
마주 보는 아즈사도 천천히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형은 이 집을 진짜 좋아하니까.”
“또, 에이쇼가 부리는 억지는 환영이니까.”
“그건 왠지 욕심쟁이가 될 것 같다고나 할까~”
실없는 말을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둘은 꼭 닮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순식간에 기분이 고양된 에이쇼는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따라오라는 듯 아즈사에게 손짓했다. 아즈사가 일어나 다가오자 에이쇼가 거침없이 방문을 활짝 열었다.
“이걸 보여줘야지!”
문을 열자 익숙한 방이 아즈사의 눈에 들어왔다. 기억하는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소소하게 달라진 것 같지만 가구의 위치 같은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오래된 기억들이 순식간에 봇물처럼 쏟아졌다. 자신도 초등학생일 무렵, 에이쇼와 놀아주다가 저 침대에서 까무룩 잠든 경험이 정말 많았다. 조금 더 크고 나서는 옆의 책상에서 종종 에이쇼의 숙제를 도와주고는 했다. 추억에 잠긴 채 나지막이 읊조린다.
“.. 이불, 조금 더 귀여운 느낌이지 않았어?”
“당연하잖아. 초등학생 때 쓰던 거니까. 딱히 유치한 거라도 상관은 없지만..”
“그리고 생각보다 깔끔해.”
“그건 집에 자주 안 들어오니까 그래.”
어지르지 않으니까 치울 필요도 없지롱. 에이쇼가 브이 사인을 만들어 보였다.
아즈사가 방을 구경하는 동안 에이쇼는 책장을 뒤져 책 두 권을 뽑아냈다. 자신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졸업 앨범이었다. 아즈사라면 분명 보고 싶어 할 거라고 줄곧 생각했다. 기세등등하게 뒤돌아 형을 부르며 손에 든 것을 보여주었다.
“어때?”
아즈사가 놀란 소리를 내며 단박에 대답했다.
“보고 싶어.”
에이쇼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좋아, 좋아. 신나서 말하며 침대에 앉은 뒤 다리를 펴고 벽에 등을 붙였다. 아즈사를 바라보며 손바닥으로 제 옆의 빈자리를 두드렸다. 아즈사도 에이쇼를 따라 침대에 앉아 벽에 기댔다. 에이쇼는 쭉 뻗은 두 사람의 다리 위에 베개를 대충 던져놓고 그 위로 중학교 졸업앨범을 얹었다. めっちゃ会いたい。 아즈사가 한 번 더 소리 내어 말했다. 그야 자신이 보지 못한 시기의 에이쇼를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기대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에이쇼가 알겠다며 서둘러 앨범을 펼쳐 자신이 찍힌 부분을 찾아 넘겼다.
“여기다.”
아즈사는 사진을 보자마자 작게 감탄했다.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정자세로 웃고 있는 증명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에이쇼도 언제나와 같이 당당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확실히 초등학생 때보다는 훨씬 커 보이지만, 지금에 비하면 앳된 느낌이 나는 얼굴이었다. 분명 매일 보던 에이쇼인데 과거의 모습을 보니 색달라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문득 어떤 것이 눈에 띄었다. 옆에 앉은 에이쇼와 사진을 번갈아 보던 아즈사가 물었다.
“피어스, 이때는 안 했구나.”
“아, 맞아. 이건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뚫은 거거든. 이거 봐 형.”
에이쇼가 손가락으로 제 입가를 가리켰다. 아즈사는 영문을 모른 채 에이쇼의 입가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에이쇼가 혀를 사용해 안쪽을 굴리자 링 모양의 피어싱이 돌돌 굴러갔다. 아즈사가 조금 충격스러운 듯 입을 벌렸다.
“.. 신기해. 안 아파?”
“전혀! 이젠 별 느낌도 안 나. .. 그래도 형은 뚫으면 안 된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렇지만 조금 만져보고 싶긴 한 걸.”
“엑. 근데, 방금 혀로 핥아서 좀..”
“농담이야.”
“···.”
다른 사진도 볼까. 에이쇼의 시선을 내버려둔 채 아즈사가 즐겁게 말했다. 아즈사는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고 앨범을 한 장씩 넘기며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정리했다. 에이쇼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가끔 한 번씩 형의 농담에 휘둘린 걸 알게 되면 왠지 분했다. 진짜로 만지는 줄 알았네. 괜히 뒤늦게 제 손으로나마 입술의 피어싱을 만지작였다. 드러난 귀를 바라보며 아즈사가 피어싱을 뚫는 상상도 해 보았다. 어른스럽고 차분한 형태라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아즈사라면 귀를 뚫어도 크게 아파하지 않을 것도 같았다. 물론 자신은 뚫지 않았으면 싶은 마음이었다. 자연스러운 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즈사 자신이 의사가 없어 보이는 건 다행이었다. 하지만, 혹시 뚫고 싶다고 한다면 꼭 내가 해 줘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이 사진 웃기다.”
“어디 봐봐. 아~ 이 녀석 진짜 웃긴 애야.”
에이쇼가 아즈사를 따라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가까워진 두 사람의 어깨가 맞닿았다. 고개를 돌리면 숨이 닿을 거리에서도 두 사람은 익숙한 듯이 떠들었다. 맞닿은 어깨 아래 좁은 공간에 놓인 두 손이 자연스럽게 스쳤다. 둘은 사진을 하나하나 짚으며 에이쇼의 중학교 시절 이야기를 했다. 에이쇼는 유명했던 선생님의 흉내를 내기도 했다. 아즈사는 본인이 교사인 것과 관계없이 웃긴 모양이었다. 얼마나 눈물이 쏙 빠지게 웃었던지, 도중에 아즈사는 에이쇼의 손등을 짝 소리가 나도록 쳤다. 그대로 한 번 겹쳐진 손은 다시 흩어지는 일이 없었다. 한참이나 서로의 공간을 침범한 채, 즐거운 목소리로 방 안이 가득 채워져 간다.
-
두꺼운 초등학교 졸업 앨범을 닫는 소리가 났다. 두 권을 살펴보며 쉴 새 없이 떠들고 나니 시간이 절로 사라져 있었다. 에이쇼는 팔을 위로 뻗어 한 번 스트레칭을 했다. 아즈사가 미련이 남은 듯 앨범의 표면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추억이네..”
에이쇼가 옆에서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추억이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귀여운 시절이라고.”
아즈사가 미동도 없이 받아친다.
“지금도 귀여워.”
큭! 에이쇼가 이를 악 물었다. 졌다. 중얼거리며 부끄러움을 떨쳐 내려는 듯 제 어깨를 두어 번 쓸었다.
“다음엔, 형 도쿄에서 찍은 사진 있으면 보여주라?”
“잔뜩 찾아둘게. ”
잠시 적막이 흘렀다. 두 사람은 약속한 듯이 같은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다. 추억. 둘의 인생 전반을 가득 채우고 있는 추억. 그리고 그것이 끊기게 되었던 날까지도. 두 사람의 과거를 떠올리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기억이었다. 에이쇼는 원망 따위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아즈사에게는 마음의 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아즈사를 잘 아는 에이쇼는 알 수 있었다. 오늘이라면 덜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막 틈새로 아즈사의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에이쇼, 기억해? 네 졸업식이 있기 얼마 전이었는데. 그때. 조곤조곤하게 털어놓는 음성에 훔치듯 옆을 살핀 에이쇼는 순간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조금 나쁜 일이 있었어….”
그의 표정이 무척이나 괴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에이쇼는 무심한 척을 하는 것도 잊고 눈썹을 찌푸렸다. 조금 나쁜 일 정도가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 한하여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안 하는 형이 저런 얼굴을 한다는 건. 에이쇼는 줄곧 아즈사가 그 일을 털어놓길 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억지로 말하는 것은 에이쇼 쪽에서 사양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말려야 할지를 몰랐다.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옛날 얘기 취급하며 웃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때 말해줘도 괜찮으니까. 그러니까 말하지 말라는 말을 에이쇼로서는 그대로 뱉어낼 수가 없었다. 짧은 시간 동안 고민하던 에이쇼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제 머리의 헤어핀을 떼어냈다. 뻗은 손은 아즈사에게로 향했다. 아즈사의 앞머리 위로 헤어핀이 소리를 내며 안착했다. 그대로 손을 움직여 머리카락을 귀에 꽂아 주었다. 핀을 꽂은 아즈사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마치 그때 그 시절처럼,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즈사가 말을 멈추고 에이쇼를 바라보았다. 에이쇼의 표정은 무척이나 슬펐다.
“.. 추억이지?”
그 슬픈 얼굴은 거울을 보는 듯했다. 내가 웃으면 똑같이 웃고, 내가 슬프면 똑같이 슬퍼한다. 그리고 언제나 나를 웃게 해주고 싶어서 부단히 노력하는 이 아이는. 뭐라 대답하고 싶은데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작은 헤어핀을 하염없이 만지던 아즈사는 무릎을 굽혀 세운 뒤 고개를 조금 숙였다. 팔을 쭉 뻗어 에이쇼의 머리 위에 올리고, 사정 없이 헝클어트리듯 쓰다듬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에이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뭐냐고 묻기도 전,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무릎에 얼굴을 기댄 채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아즈사가 보였다.
“에이쇼가 너무 기특해서 어쩔 줄 모르겠어. 一体どうすればいいかな。”
에이쇼는 눈을 가린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다시 그를 눈에 담았다. 역시 웃고 있었다. 웃게 만들었다. 나 때문에 웃고 있다. 아즈사를 따라 웃었다. 제가 웃자 아즈사는 눈을 더 가늘게 휘었다. 에이쇼가 외쳤다.
“めいっぱい楽しんでな!”
두 사람은 한참을 마주 본 채 웃었다.
-
“이제 슬슬 밥 먹자. 시간 되게 빠르네.”
“좋아. 혹시 주방 빌려도 괜찮을까?”
“그거야 당연히 오케이지. 만들어 주려고?”
“응. 하고 싶은 게 있어서.. 도와줄래?”
아즈사가 만들고자 한 것은 밀푀유나베였다. 이유인즉슨, 옛날 에이쇼의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셔 다 함께 둘러앉아 먹었던 기억이 나서였다. 아직도 명절 즈음이 되면 떠오르는 기억이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만들어서인지 둘이 먹기에는 많은 양이 나왔다. 내가 힘내볼까. 에이쇼가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때쯤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가족들이 돌아왔다. 원래 저녁까지 먹고 들어오려고 했으나 맛있는 것이라도 해주고 싶어 일찍 왔다고 했다. 최종적으로는 아즈사의 요리에 어머니의 손까지 더해져 다섯이서 먹기에도 많은 식탁이 차려졌다. 결국엔 에이쇼가 힘내야 하는 결말이었다. 식사하는 내내 식탁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끊이질 않았다. 이 시간이 끝없이 이어진다면 아즈사는 끝없이 웃어도 지치지 않을 것 같았다.
뒷정리를 마친 뒤, 아즈사가 겉옷을 챙겨 입으며 말했다.
“에이쇼, 간만에 집에 왔는데 오늘은 자고 올래? 나는 먼저 갈게.”
조금 고민하는 소리를 내던 에이쇼가 단박에 외쳤다.
“아니! 역시 우리 집에 가서 잘래.”
“얘가, 아주 제 집 다 됐구만.”
옆에서 그렇게 말하는 소리에도 에이쇼는 굴하지 않고 쾌활하게 웃었다. 아즈사는 고개를 끄덕인 뒤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오늘은 감사했어요. .. 정말로요.”
“우리가 더 고맙지. 에이쇼가 신세 많이 지고 있어.”
“에이쇼가 있어서 제가 더 좋은걸요.”
현관을 나서기 전까지도 한참이나 못다 한 인사를 나누고, 집을 나서려는 찰나 그 말은 들려왔다.
“아즈사 군. 다음에 또 와.”
“네 집처럼 편하게 생각하렴.”
아즈사는 한참이나 발을 떼지 못했다.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따뜻한 것이 가슴속에서 마구 일렁이는 느낌이었다. 수십 가지의 표현 중 골라내고 골라내 겨우 한 마디를 전하고 나서야 발은 움직였다. 아즈사가 말했다.
“また来ます。”
집을 나서자 어둠에 깔린 하늘이 펼쳐졌다. 떠나려는 순간에 옆 건물이 자연히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아즈사는 깨달았다. 무척이나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오늘 단 한 번도 그곳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을. 키타 가에 대한 생각으로 점철되어 의식할 틈이 없었다. 그렇게나 빈번히 꿈에 나오며 괴롭게 했던 집이다. 그 실체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오래된 건물이었다. 켜져 있는 전등도 하나 없이 어두웠으나 그저 그뿐이었다. 다시는 돌아갈 일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두려움도, 그 어떤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한발 앞서 걷던 발걸음이 멈추는 소리가 들린다. 앞을 바라보았다. 에이쇼가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손을 뻗는다. 주황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다. 아즈사는 자신이 줄곧 어둠 속에서 벗어나길 바라온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야. 에이쇼. 나는,
“뭐해? 집에 가자.”
네가 있으면 아무리 어두운 길이라도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말없이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에이쇼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웃었다. 찬 가을바람에도 맞잡은 손이 따뜻했다. 아즈사는 다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에이쇼는 종종 손을 앞뒤로 흔들며 휘파람을 불었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잡은 채 걸었다. 집으로 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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