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태. 오늘 저녁에 한잔 할래?”
친구 정호가 기태의 책상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갑자기 뭐고. 그 눈빛을 읽어낸 정호는 기태가 묻기도 전에 능청을 떨었다. 소주잔을 기울이는 손짓은 덤으로.
“짐 날씨도 좋은데, 강변에서 딱 펼쳐놓고 먹으면 낭만 디진다이가.”
“우예 했노?”
“동민이네 형이 뚫어줬단다.”
“맞나.”
동민에게는 나이 차이 꽤 나는 형이 있었다. 그 형이 기꺼이 사다 주겠다고 한 모양이다. 형…. 또 생각하니 마음을 복잡스럽게 했다. 평소 같으면 굳이 흥미 없다 하고 집에나 일찍 갔을 터였다. 그런데 요즘 기태는 그러기가 내키지 않았다. 집에 가면 형이 있기 때문이다. 동민처럼 친형은 아니고, 아마도 친형제보다 사이가 좋을 지수 형이다. 지수를 떠올리면 마음이 울렁울렁거렸다. 보기 싫은 건 아닌데 보고 있으면 근질거려서 미치겠다. 그 이유를 깨닫게 된 때조차 얼마 지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질풍노도의 기간이었다. 이 시기에 정호의 제안은 딱 좋은 유흥거리였다.
“…좋제. 가자.”
“웬일이고 최기태. 맨날 빼는 놈이.”
“너거들 맨날 피워대는 담배랑 이거랑 같나. 갈 수도 있제.”
“알았다 마. 누가 뭐라 했나. 좋다는 거지.”
정호가 기태의 등을 치며 웃었다. 기태도 함께 웃었다. 마음이 한결 편했다.
소주
[형]
[나 오늘 동민이네 집에서 자고 간다 기다리지 마]
그렇게 문자를 보내자 몇 분 만에 답장이 왔다.
[알았어. 재밌게 놀고 와~]
[내일 주말이라고 너무 무리하지 말고]
[미리 잘 자.]
글자에서도 지수의 웃는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너무 다정해서 괜히 또 마음이 쿡쿡 쑤셨다. 형도 잘 자… 답장을 보낼까 하다가 그냥 지워버리고 말았다. 그대로 휴대폰을 닫아 주머니에 던져 넣었다. 오늘은 지수에 대해 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정호의 말대로 날씨가 선선하니 운치가 좋았다. 적당히 시원하게 부는 바람, 적당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 적당하게 시끄러운 분위기. 저 멀리에는 밤거리의 촌스러운 네온사인들이 번쩍이고 있다. 조금씩 취해갈수록 불빛은 멀어지듯 흐려 보인다. 하나둘씩 나사를 잃어가는 친구들의 모습도 그저 희극의 한 장면 같다. 뭣도 모르고 웃다 보면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다.
“닌 어떤데?”
“어? 뭐라 했노?”
“새끼, 안 듣고 있었노.”
옆에서 팔을 퍽 쳐오기에 나가 있던 정신을 돌이켰다. 딴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이 딱 걸려 머쓱했다. 그런 기태를 두고 친구들은 신나서 몰이를 시작한다.
“이 자슥 지는 여친 있다고 관심도 없다이가.”
“뭐고? 내가 뭔 여친이 있노.”
“니 명찰 드럽게 붙이고 다니는 거 전 국민이 다 안다.”
“아, 또 그 소리가.”
“아니면 뭔데? 머스마가 수상하게 자꾸 숨기니까 그렇제.”
아마 최근에 여자친구에게 차인 지훈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나 보다. 잡힐 건덕지를 내어 주자 금세 이목이 기태에게로 쏠렸다. 그거 붙인 이후로 여친 사귀는 걸 못 봤다던가 하는 비방이 연이어 들어왔다. 확실히 기태의 학교 가방에는 남의 명찰이 붙어 있었다. 여자친구는 아니고 민지수 세 글자가 적힌 형의 고등학생 시절 명찰이. 이름이 여자 같아서 처음부터 오해를 많이 받았다. 때마다 꾸준히 아니라며 부정해 왔지만 갈수록 귀찮아서 대충 대꾸하게 되었다. 지수를 만난 이후 여자친구를 사귀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 지수와 있는 것이 훨씬 즐거워 흥미를 잃은 것도 사실이었다. 매번 부정만 하지 그래서 민지수가 누구인지는 죽어도 말하지 않았으므로 다들 궁금해 죽을 만도 했다. 그렇대도 알려줄 생각은 없다. 지수에 대한 마음을 자각하기 전부터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렇게 의심을 받아도 뗄 생각이란 추호도 안 하는 황소고집이니 오죽할까. 친구들은 기태가 결심한 한 평생 그의 정체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좀 취해서일까. 짝사랑에 이런 오해를 받는 것도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지수 생각은 그만두겠다면서 금세 이렇게 떠올리고 있지 않은가.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 한숨을 쉬었다.
“말도 마라. 좀 사귈 수나 있으면 좋겠네.”
그 발언에 일순간 공간이 붕 떴다 떨어졌다. 일동의 환호, 야유, 감탄이 뒤섞인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사귀는 줄 알았더니 혼자 좋아하는 거였나.”
“이럼 말 못할 만 하제! 찐따맹키로.”
“실연이 얼마나 힘든데 마, 내 이해한다.”
“아이다! 내가 닌 줄 아나. 안 차였거든.”
지훈의 측은함 가득한 발언에 버럭 성을 냈다. 매일 한 집에서 같이 자는 사이인데, 이제 말도 못 붙이는 지훈과 동일시하면 곤란하다. 하지만 그런 사이가 된다면 지훈처럼 추한 꼴을 보이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왔다. 오늘은 잊어버리고 싶어 자꾸만 술잔에 손이 갔다. 조용한 기태를 두고 온갖 추측과 훈수가 난무하고 있었다.
“말 좀 해봐라. 어디 학교고.”
“이쁘나? 사진 좀 보자.”
“이 새끼 눈 높은데 어떤 가시나가 그래 애를 태우나.”
“걍 밀어붙여라 마.”
가시나 아니라고, 새끼들아. 그렇게 소리를 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답지 않게 얌전히 듣고 있으니 다들 신나서 날뛴다. 벌써 몇 병을 깠으니 슬슬 미쳐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중 귓속에 박히는 말이 있었다.
“니가 답답하게 구니까 안 되제. 고백을 해라.”
“…그래도 우째 그러노.”
“우야긴 뭐라카노, 가시나들은 원래 먼저 고백 안 한다. 그리고 관심 없는 놈한테 명찰 안 준다이가. 기다리고 있는 거다.”
“맞나..”
“그래, 니 무슨 순정파가? 안 어울린다.”
순정파… 고백…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이 조각조각 쪼개져 머리 위를 맴돌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지수가 있었다. 서로 좋아해서 고백하고 받아주고. 그렇게 간단하면 참 좋았겠지만. 현실적으로 고등학생의 고백을 받아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망상은 공짜다. 만약 지수가 제 고백을 기다리고 있다면, 그래서 받아준다면… 상상만 해도 앞으로의 인생까지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시점에서 기태의 정신머리는 알코올과 함께 휘발되어 공기 중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몽롱하다는 말이 어울릴 얼굴로 중얼거렸다.
“순정.. 맞다.”
“아, 뭐라카노.”
“이 새끼 취했나.”
“시바, 그만하자. 토 나온다.”
순식간에 야유가 쏟아진다. 친구의 순정에 역겨움을 느끼는 고등학생들은 금세 화제를 돌려 다시 떠들기 시작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태의 정신은 바람에 실려 집까지 날아가는 중이다. 한 잔, 두 잔, 세 잔, 세상모르고 목구멍으로 넘기다 보면 몸과 정신이 분리된 기분조차 잊고 만다. 기억은 뒤섞여 직전까지 친구들과 나누었던 얘기가 기태의 마음을 지배한다. 걍 밀어붙여라, 밀어붙여… 그 말이 고장 난 카세트 라디오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백 번 생각해도 맞는 말이었다. 까짓거 밀어붙이면 될 것 아닌가. 좋으면 좋다고 하면 되지. 왜 지금껏 하지 않았단 말인가? 오히려 안 될 이유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당장 실천으로 옮기고 싶었다. 눈앞에 지수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수의 마음에 뭐라도 남기고 싶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이토록 솟구치는 용기가 안드로메다로 떠난 정신 때문이라는 것은 죽어도 모른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같은 상태라 막아줄 사람도 없다. 그렇게 브레이크를 잃은 기관차만 남아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내 가야겠다. 한 마디 내뱉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최기태 어디가노.”
“집 간다.”
“집? 니 돌았나. 니 가면 뒤진다 빙시야!”
“됐다. 내 안 혼낸다.”
“맨날 엄마한테 처맞으면서 뭐라캐쌌노.. 마!”
친구들의 비난 섞인 투덜댐을 뒤로하고 앞만 보며 달려나간다. 엄마한테 가는 거 아니니까, 바보들아. 난 오늘 어른의 선을 넘을 거다···.
소파
집 앞에 선 기태는 손을 주머니 속에 꽂아 넣었다. 촉감으로 지수가 준 제 몫의 여분 키를 찾아 꺼낸다. 요즘 아파트들은 다 번호키라는데 기태는 이 익숙한 열쇠 문이 좋았다. 형이 제게 키를 주었다는 사실이 어떤 자부심 같은 걸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부끄럽게 손이 자꾸 헛돌았다. 취했고 급해서 그렇다. 헛손질을 몇 번 하고는 키를 꽂아 넣었다. 철컥. 문이 열리자 얼마 가지 않아 발 소리가 들린다.
“기태? 오늘 못 온다더니… 아이고.”
지수다. 너무 보고 싶어서, 술 먹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딱 한 사람이라서 죽어라 달려온 그 사람이다. 하고 싶은 말은 가득 있는데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 가만히 있는다. 지수의 입 모양이 변할 때 온 신경은 그리로 향한다.
“술 마셨어?”
순간 기태는 언짢은 듯 눈썹을 꿈틀였다.
저 봐라 저. 또 서울 가시나맹키로.. 말꼬리를 요사스럽게 올려대고. 곧잘 자기와 부산말로 대화하다가도 잠깐 눈을 떼면 다시 서울로 돌아가 있다. 마치 내가 없던 시절에 적응해 버린 것 같아서 싫다. 기태 또한 지수가 없던 시절을 잘 살아내지 못했냐 하면 전혀 아니지만, 반대는 싫은 게 사람 마음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자신은 형이 떠난다고 하면 전처럼 잘 살 자신이 없다. 묘하게 열이 받는다.
지수가 기태의 날린 머리카락을 조금 만지더니 말한다. “많이도 마셨네….” 그러더니 우두커니 서 있는 기태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기태는 내내 한 마디도 안 했는데 혼자서 뭐라고 계속 말해 댄다.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신은 이렇게 애가 닳아 있는데 평소와 같은 모습이.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써 끝이다.
“이리 와라. 뭔 일 없제? 너 알아서 잘 하는 건 아는데 무슨 일 있으면 말해라. 걱정되네. 술 먹고 싶음 형한테 말을 하지. 자슥… ”
“말 드럽게 많네. 형이 내 엄마가.”
풀썩. 갑작스레 실린 무게에 소파가 일순 푹 꺼졌다. 기태는 지수를 소파로 밀어 앉힌 뒤 그를 마주 보며 무릎 위로 앉았다. 두 팔을 뻗어 소파에 지탱하자 지수는 완전히 그 사이에 갇힌 꼴이 되었다. 술 냄새가 확 끼쳤다. 그는 애써 침착한 말투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너 취했다.. 이불 깔아줄게. 자라.”
“형 왜 자꾸 서울 말 쓰노.”
“서울 말? 내 방금 서울 말했나. 아이다. 남들 보기엔 그냥 부산 사람이다. …내려와라 기태야.”
“내 보기엔 그런데 남들 보는게 뭔 상관이고… 쫌!”
분한 마음에 기태는 꽉 쥔 주먹으로 소파를 내질렀다. 순간 지수는 몸을 움찔 떨었다. 물씬 풍기는 술 냄새, 풀린 눈, 이어지지 않고 헛도는 대화. 어디부터 해결해야 할지 막막했다. 기태를 쭉 훑어보면 문득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든다. 술 같은 건 쳐다도 안 볼 어린 애였는데 언제 이렇게 컸는지. 하지만 동생이 이렇게 커서 막막해지는 건 예상 외였다. 대답을 찾지 못한 채 바라보고만 있자 기태가 고개를 푹 숙였다. 몇 번 헤집었는지 난장판이 된 기태의 머리카락이 콧등을 간질인다. 머리를 쓸어넘겨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일종의 고질병일까. 고개를 들어 올린 그가 눈을 마주쳐 오면, 곧 닿아버릴 거리에 숨을 참을 수밖에 없다. 어른으로서의 직감이 알려주고 있었다. 침묵만큼이나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어떤 말이라도 하면 안 될 것 같은 감각이 온몸을 찌른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기태의 입이 열린다. 숨도 입도 꽉 다물려 있는데 심장은 뭣도 모르고 뛰어 댄다. 가까워.
쿵, 쿵, 쿵……
……후우. 지수는 참았던 숨을 한껏 내쉬었다. 다가오던 기태는 그대로 고꾸라지듯 제 목덜미에 머리를 묻어버렸다. 아직 식지 않은 냉기가 차가웠다. 기태가 졸린 듯한 신음을 웅얼거린다. 손을 뻗어 뒤통수를 천천히 쓸어주었다. 기태의 술 버릇이 이렇게 심한 줄은 몰랐다. 간섭할 생각은 없었지만 많이 먹지 말라고 한 마디 정도는 해야겠다. 방금 전의 이상한 느낌은 그저 기우이길 바란다. 이대로 잠드려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힉.”
지수의 몸이 또 한 번 움찔 떨렸다. 기태가 제 얼굴을 박고 있는 목덜미를 혀로 선명하게 핥았다. 좋은 냄새 난다… 그런 말을 중얼거리고.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축 쳐져 있는 것 같은데 밀어내려고 하면 떡하니 앉아서 버티고 있었다. “니 진짜 뵈는 게 없제.” 기태를 애써 밀어내며 말했다. 기태가 살에 얼굴을 부비적대던 것을 돌연 멈추었다. 많이 느릿해진 말투가 들려왔다.
“맞나… 내 뵈는 게 없다. 그니까 형, 내 좀 봐도….”
“보고 있다. 기태 이제 술 마이 묵지 마라. 밖에 나가가 이러면 우짤라고.”
“자꾸… 답답하게 뭔 소리고. 술 좀 뭇다고 아무한테나 이러겠나….”
“아니면 와 이라노, 기태야..”
여전히 대화는 맞물릴 듯 헛돈다. 당황스러워하는 지수에 반해, 기태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보나 마나 지수는 취해서 아무 말이나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게 뻔하다. 아니면 일부러 모른 척하거나. 어느 쪽이어도 열이 받는 건 매한가지다. 취해서 이러고 있는 게 사실이래도, 취객은 자신이 만취한 줄 모르는 법이다. 취한 기태는 끝을 보고 싶었다. 선을 넘고 싶었다. 따뜻하고 얇은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밟는다.
“내 형 좋아하는거 형도 알제.”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는다. 당연하다. 곧 지수가 얼빠진 답변을 더디게 내놓는다.
“…모. 모르는데.”
“농담할 기분 아이다.”
“내도, 농담 아이다…”
기태는 찌푸리고 있던 얼굴을 쳐들었다. 갑자기 시선을 마주치자 지수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기태를 올려다보았다. 그것도 잠시고 이내 눈을 이리저리 피한다. 지수의 얼굴에는 온통 혼란스러운 기색뿐이었다. 평소 지수가 기태를 알듯 기태도 지수를 잘 알았다. 도저히 알면서 모른 척하고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솔직히 지수가 아무것도 모르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왔다. 최근 기태의 행색은 확연히 평소와 달랐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수를 피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기도 했고.
“아, 진짜.. 이따위로 말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러나 쪽팔림이라는 감정은 잊은 지 한참이었다. 흔들리는 동공을 바라보며 가만 생각해 보니 어이가 없어지는 것이다. 바보 아이가. 왜 모르는데. 그래서 역으로 성을 내듯 따지게 되는 건 기태였다.
“말이 되나. 평소에 내 뭔 생각하는지는 다 알면서 이건 모르는 게. 얼마나 티가 나는데.”
“티 안 난다. 그래 생각하겠나. 기태 니가 내였으면….”
내가 형이었음? 장난 없지. 기태 이쁘다 멋지다 하고 안아주고 뽀뽀해 주고 사랑해 줬을 거다. …아니, 이건 지금도 뽀뽀 빼면 똑같다이가. 형 억수로 내 좋아하네. 그렇게 좋은데 왜 안 좋아해 주노. 그래, 형은 당연히 생각 안 했겠제. 나를 지네 초등학교 얼라들이랑 똑같이 생각하는데. 근데 형이 알아야 되는 게 있다. 얼라 아인 지 쪼매 됐다고 잊었나 본데, 원래 모든 사람은 소싯적 첫사랑에 꽤나 진심이었다.
“…아무튼, 그럼 이제 아니까 됐네. 형,”
“어.. 듣고 있다.”
“내 키스해도.”
“….”
니 돌았나. 그런 말이 나오려던 입을 지수는 간신히 틀어막았다. 한순간에 충격적인 발언들이 쏟아져 나와 혼란스러웠다. 최근 묘하게 전과 달라져 걱정했던 시간들을 처음부터 짜 맞춰야 했다. 가끔씩 눈을 피하고 퉁명스러웠던 나날, 괜히 등을 돌리고 잠들었던 날(물론 일어나 보면 전처럼 끌어안고 있었다), 그럴 때구나 하며 넘어가려 노력했던 날들이 모두. 기태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그렇지만 당장의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회상 따위보다 급선무다. 기태는 여전히 내려갈 생각 없이 버티고 앉아 팔 사이에 지수를 가두고 있었다. 나른한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절대로 비킬 수 없다는 무언의 의지가 느껴졌다. 자신을 누르고 있는 것이 몸도 마음도 부쩍 무겁게 느껴진다. 무엇이 기태를 이렇게 만드는 걸까. 그리고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드는 걸까. 기태가 상반신을 바짝 기울이기에 반사적으로 두 손바닥을 펼쳐 가로막았다. 기태의 어깻죽지가 손에 닿았다. 몸에 큰 힘을 주고 있지 않아 밀어낸다면 밀릴 것 같기도 했다. 또한 기태가 아무리 취했기로서니 확실하게 내친다면 더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어째서일까… 이런 상황에조차 기태에게 모질게 굴지 못하겠는 건.
“싫으면 쳐라.”
“내가 니를 어떻게 때리노, 고마해라.”
“형이야말로 밖에 가가 이런 일 생기면 가만 있을라고 카나. 술도 안 마셨음서 약해 빠졌다.”
“진짜 화낸다, 쫌…”
와중에도 기태는 계속해서 얼굴을 들이민다. 한없이 가까워진 거리에 이제는 완전히 머리를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기태와 소파 사이에 끼어있을 뿐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지수는 기태에게 약하다. 알고 있었다. 그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을 뿐이다. 기태가 사람에게 애처로움을 유발하는 유형이냐 하면 결코 아니다. 다만 지수에게는 그렇다면 감히 누가 반박할 수 있을까. 모두 자신을 나약하게 만드는 것들뿐인데. 나 좀 봐달라는 말도, 억지로 너스레를 떠는 얼굴의 기울어진 팔자 눈썹도, “진짜 화낼거가.” 이 간절한 목소리도. 지수는 앞으로 평생 기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둘 지 모른다. 자신의 이기심에 신물이 났다. 결국 겁나는 것뿐이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어떤 예감에 이끌리며 두 눈을 제자리로 돌리면,
“내 미워할 기가..”
기태의 애처로운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
“나는 니 절대 안 미워한다.”
기태의 미소가 눈동자에 닿았다.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 기태는 망설임 없이 지수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단 맛이 났다. 알코올은 참 맛대가리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맛이라면 백 병은 더 마실 수도 있다. 아까부터 무시했던 갈증이 한순간에 들이치는 것 같다. 조급하게 혀를 밀어 넣고 지수의 입안을 핥아 댔다. 소리는 꼭 물이 있는 것처럼 질척대지만 갈증은 전혀 해소되지 않는다. 그럴수록 감질 나 기태의 마음은 달아오를 뿐이다. 계속해서 밀어붙이자 체중이 앞으로 쏠렸다. 지수의 목이 뒤로 젖혀져 지탱할 것이 푹신하다 못해 맥없는 소파 뿐이었다. 기태는 틈 사이로 손을 넣어 지수의 머리를 받쳤다. 차가웠던 손은 본래의 체온을 되찾은 지 오래였다. 그의 부드러운 촉감이 좋아 쉴 새 없이 뒷머리를 매만진다. 밀어내기 위해 닿았던 지수의 손은 어느샌가 기태의 옷을 꽉 구겨대고 있었다. 지수가 그 손에 얼마나 힘을 주던 기태는 더 이상 멈출 수가 없다. 한 번 알딸딸해지면 신나서 마구 들이붓기 시작하는 것처럼, 한 번 입술을 맞대자 좋아서 견딜 수가 없다. 지수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에 빠져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지수는 어쩌면 키스하는 것조차 지수 같다. 기태가 아무리 입안을 마구 헤집어 놓아도 전부 받아주었다. 그 어른 같은 모습이 항상 좋았다. 언제까지나 지수가 받아주는 것은 자신 하나뿐이었으면 한다. 그걸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밀어붙일 수 있다. 실컷 빨아 대다 입을 떼자 사이로 타액이 딸려 나왔다.
“기태,”
말은 이어지지 못한다. 숨을 고를 시간도 없이 기태는 금방 입술을 붙였다. 계속 무언가 말하려는 듯 빈틈 사이로 지수의 신음이 튀어나왔다. 추호도 들을 생각이 없는 기태에게는 그저 듣기 좋은 목소리다. 지수의 입은 아무리 깨물고 핥아도 계속 달콤한 맛이 난다. 사람이 이렇게 달 수 있는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가능하면 형을 전부 입안에 넣고 싶다. 그런 염원을 담아 입술을 세게 깨물자, 지수가 눈에 띄게 몸을 떨었다. 그가 제지하려는 듯 팔을 들어 올리려고 한다. 조금만 더 맛보고 싶었다. 지수의 손목을 낚아채듯 붙잡아 고정시키고 입질을 이어갔다. 손목의 저항감이 전해져 오지만 기태의 힘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다. 자꾸만 피하려고 하는 지수를 밀어붙이자 몸이 점점 소파를 타고 미끄러져 내린다. 기태는 완전히 소파에 누운 지수의 위에 그대로 엎드려 올라탔다. 두 사람의 움직임에 소파가 삐걱삐걱 소리를 낸다.
기태에 의해 터진 입술이 따끔거렸다. 뿐만 아니라 숨이 견딜 수 없이 버거워 떨쳐내고 싶었다. 하지만 기태가 양 손목을 꽉 누르고 있어 제 힘으로 풀 수가 없었다. 오히려 밀어내려 할수록 꽉 죄어 오는 악력에 팔이 저릿했다. 설상가상으로 맞닿아 있는 아랫도리에 기태의 흥분한 기색이 역력하다. 한 번 받아주고 끝내려고 했던 일이 정도를 모르고 커지고 있었다. 기태는 완전히 푹 빠져 있는 듯했다. 눈을 감은 채 붉게 달아오른 고개를 비틀며 계속해서 키스해 왔다. 입안을 침범하는 숨소리가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고, 달큰하고 씁쓸한 소주의 맛이 혀를 괴롭힌다. 머리카락이 소파에 부벼지며 한껏 흐트러져 갔다. 얼굴에 한가득 열이 올랐다. 터진 입술을 자꾸만 핥고 빨아 대니 상처가 쓰라리다. 기태의 혀는 자꾸만 깊숙이 들어오려 해 숨이 막혔다. 점점 받아주는 것도 벅차 지치지 않는 기태에게 일방적으로 키스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항하는 것조차 지치는 것을 느낀다. 흘러내린 기태의 앞머리가 이마를 간질인다. 곧이어 그가 눈꺼풀을 꿈뻑이며 자신을 찾는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건지 몽롱한 눈은 취한 사람의 것이 확실하다. 그 눈은 지수를 자꾸만 찾아 헤맨다. 바로 앞에 있는대도. 그렇게나 좋아하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남의 마음은 생각도 없이 멋대로 구는 기태라니. 자신이 너무 안일하고 간단하게 여겼던 모양이었다. 입술의 상처보다도 마음이 아렸다.
기태는 겨우내 숨을 돌리기 위해 입을 떼어냈다. 어쩐지 끝나갈 즘엔 지수는 얌전했다. 아까부터 아래가 터질 것 같이 뻐근했다. 자극에 절어버린 뇌는 여전히 빙글빙글 돌고 있고. 좋음이란 감정은 사라지지를 않아, 몇 번만 더 할까. 이 다음은 안 되나. 그런 생각을 얼굴 표면으로 전부 내보내고 있었다.
“아!”
그때 거친 타격과 함께 기태는 소파 밑으로 굴러떨어져 쿵 소리를 냈다. 배가 욱신거렸다. “형?” 주저앉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지수가 몸을 일으키며 손목을 문질 거렸다. 그제야 지수의 모습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기태 니.”
시뻘게진 손목, 온통 흐트러진 매무새, 입술은 터져서 피를 내고 있고. 무엇보다 상기된 얼굴의 눈 끝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아차 싶은 마음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다 받아주니까 우습나.”
“…아니, 아이다, 형..”
그렇게 말하는 지수의 목소리가 너무나 아파 보여 변명할 수가 없었다. 절대로 우습게 본 게 아니라고, 너무 좋아해서 바보같이 실수했다고 말해야 하는데. 이럴 때조차 온몸이 말을 듣지 않아 처음으로 술을 마신 게 원망스러워졌다. 지금이라도 몇 시간 전의 자신을 후드려 패고 싶었다. 형이 화내는 건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이러다 평생 안 본다고 내쫓기면 어떡하지. 점점 안절부절에 울상이 되어 갔다. 그런 기태를 전부 눈에 담던 지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침묵을 깼다. 찌푸려 있던 눈썹이 제 자리를 찾아갔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태에게 손을 내밀었다.
“화난 거 아이다. 자, 인나라. 퍼뜩.”
기태는 놓칠 세라 손을 잡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제 손을 양손으로 꼬옥 감싸고 있는 모습이 안절부절못하기 그지없다. 앞 일 모르고 다가올 땐 언제고, 이렇게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니 화를 내려야 낼 수가 없었다. 대체 기태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지수 자신도 몰랐다. 애초에, 제대로 선 긋지 않은 자신의 잘못도 있지 않겠는가. 발을 옮기자 기태가 손을 붙잡은 그대로 총총 따라왔다. 욕실 앞으로 데려다 놓고 멈추었는데도 손을 놓지 않았다. 아직도 울상인 채 지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지수의 표정도 측은해져 간다. 지수가 담담히 말을 건넸다.
“니 안 미워한다고 했제. 응?”
“……응.”
“그래. 그냥… 지금 니 얼굴 보기가 힘들어가 그런다. 그니까 씻고 나와서 자고 내일 얘기하자. 어디 안 가께.”
“진짜제. 형. 내…”
“됐다. 고마 들어가 씻고 온나. 허튼 생각 하지 말고. 내 먼저 잘게.”
기태의 머리를 헤집듯 쓰다듬으며 말을 가로막았다. 곧장 등을 떠밀어 욕실에 집어넣은 뒤 문을 닫았다. 잠시 지켜보았지만 다시 나오지는 않았다. 갈아입을 옷을 앞에 두겠다는 말을 기태에게 전했다. 금방 문 너머에서 짧게 대답이 들려왔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뒤늦게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소싯적 첫사랑
욕실 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발 소리는 잠시 몇 군데를 오갔다가 방문 앞에 선다. 곧장 들어오지 않아 듣는 사람이 되려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고 닫히면, 언제 그랬냐는 양 자는 얼굴을 한다.
기태에게는 먼저 자겠다고 했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태평하게 잠이 오지 않기도 했고, 기태가 멀쩡히 들어와 잠들지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이부자리 앞까지 온 기태의 인기척이 가까워진다. 앞에 잠시 앉은 듯했다. 혹시 자는 척하는 걸 기태가 눈치챌까 긴장되었다. 가만히 앉아서 무얼 하고 있나.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손가락이 얼굴에 닿았다. 기태를 굳게 믿고 있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기태는 그 이상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을 움직여 입가를 매만졌다. 입꼬리의 꿰맨 상처를 몇 번 만져 보더니, 엄지손가락으로 제가 터트린 입술을 부드럽게 쓸었다. 숨 막히는 적막만이 남은 방 안에서 기태의 두 입술이 떼어지는 소리가 난다.
“형.”
“…미안타. 함부로 굴어서.”
“그래도 내 안 싫어하면 좋겠네.”
지수는 애써 미동하지 않았다. 또다. 또 자신을 나약하게 만드는 기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가슴이 쿡쿡 쑤셨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고, 무엇이 기태를 이렇게 만들까. 아직은 모르겠다. 하지만 지수가 기태를 싫어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기태가 이불을 들추고 꾸물꾸물 안으로 들어온다. 깨우지 않으려 조심하면서도 힘을 들여 끌어안는 몸짓이 느껴진다. 순식간에 익숙한 체온으로 안이 덥혀진다. 언제는 잠을 이루지 못했냐는 마냥, 순식간에 졸음이 찾아온다. 심장 박동이 귓가를 일정하게 울린다. 두 심장은 같은 장소에서 뛰고 있다. 서로를 향하는 마음의 형태가 바뀌어 간대도, 변함이 없이. 첫사랑을 회상하게 될 언젠가에도 여전히…
